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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네

- 제주는 갑자기 눈이 왔다. 제주도 날씨의 장점은 겨울에 따뜻하다는 것이고 단점은 눈, 비가 많다는 것이다. 비나 눈이나 사람 발목 잡기는 마찬가지여서 여름이나 겨울에는 갑자기 일을 하게 되거나 또는 못하게 되거나 하는 경우들이 생긴다. 자영업자의 스케쥴 관리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다 하고 합리화를 해본다.. 나는 남쪽에 살고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눈 때문에 못 다니는 일이 없지만 문제는 말은 대부분 동쪽에 있다는 점이다. 제주도의 따뜻한 부분은 대부분 귤 농사를 짓고 있고, 원체 제주도가 따뜻한 지역이라고 해도 제주시 중산간과 서귀포 남쪽 해안가의 온도차이는 평균적으로 3-5도 정도가 난다. 따라서 말을 키울 초지가 없고 말들은 자연히 동쪽이나 서쪽에 살게 됐다. 언젠가 귤을 사먹게 된다면 서귀포인지 제주인지를 잘 보시도록.. 서귀포 사람들은 제주 귤 안먹는다는 농담이 있는 동네다. 아무튼 동쪽으로 넘어가는 지름길은 생각보다 험한 산길인데다 눈이 많이 쌓이는 곳이라 조금 더 먼 길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시동을 걸었다. 진동은 며칠전에 비해 제법 강해져서 머리가 덜덜 떨리는 기분이었다. 따뜻할 때 거는 시동이 확실히 부드럽다. 예열을 해야 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차의 운행 초반은 부드럽게 운전하는 것이 좋다고 하더라. 도로에는 차들이 슬슬 줄을 서고 있었고 오늘 아침엔 유독 내가 제일 싫어하는 운전-원하지 않는데 천천히 가야하는-을 하겠구나 했다. 차는 열이 덜 올랐는지 정차 후 출발할 때 1단 기어가 종종 들어가지 않았다. 가지고 싶은 차 중 하나인 마쯔다의 미아타가 예열이 덜 되면 주행 중 1단이 안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내 차는 미아타가 아니니 그저 열만 받았다. 다들 정신없이 끼어들고 멈추고 하는 야비한 운전을 했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차가 높아서 잘보임) 이런 것들이 한국인의 기질일까, 아니면 개인적인 기질일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나 또한 운전대를 잡으면 좀 거친 인간..이 되는데 이런 답답한 것을 못 견디는 성질이 전반적인 한국인의 기질이라면 그로 인해 이만큼 잘사는 나라가 됐을 수도 있겠다.

- 쉬는 날 마르지엘라 쇼를 봤다. 2023 f/w인데 오뜨꾸뛰르 였는지 프레타포르테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라는 인간의 패션 감각이란게 영 글러먹어서 옷 좀 잘입고 싶어서 본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명품을 좋아해서 본 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잘나가는데는 이유가 있겠지 하는 심정으로 봤다. 패션에 대해서 일자무식이지만 마르지엘라가 역사가 오래 된 명품은 아니라고 알고있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너도 나도 마르지엘라를 찾는 것이 못내 수상했다. 돈 쓰는 놈들의 눈은 대체로 틀리지 않으니 뭐... 쇼는 사실 발렌티노나 베르사체, 칼 라거펠트 시절의 구찌 급은 아니긴 했다. 모델들에게 마스크를 씌워놓고 옷 입히고 해서 젠더의 경계를 완전히 부셔버린 것 같았는데 내가 느끼기에 최근에 본 것들 중 가장 비젠더적인 무언가가 아니었나 싶다. 마르지엘라의 수석 디자이너는 존 갈리아노다. 지방시와 디올을 거친 사람이고 나 같은 패션테러리스트도 한 번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거 같다. 마르지엘라는 독일군 운동화나 배껴 만드는 애들인 줄 알았는데, 잘하는 놈이 건드리면 뭐가 달라도 달라지나 보다. 내가 옷을 안 좋아하게 된 이유는 일단 내 자신이 좋은 태를 가진 멋진 사람이 아니고, 둘째로 의복이 나에게 주는 만족감 같은 것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데에 있다. 옷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옷에서 만족감을 못느끼는, 그래서 옷을 안 좋아하는 이상한 순환이다. 또 그렇다고 의류잡화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하기엔 가죽 부츠를 대여섯켤레 가지고 있는데... 어쩌면 매드맥스 세상이 와서 모든 인간이 피혁류를 일상적으로 걸치게 된다면 그 땐 나도 패션에 관심이 갈지도 모른다.

- 현대의 예술이란 것이 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는 계속 옛 것들을 답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답습이라기 보단 헌사나 찬양에 가깝겠다. 웨스 앤더슨 영화의 그 잘 맞춘 대칭이 뭐가 좋은지 모르겠어서 거의 안봤는데 최근 넷플릭스에 올라온 로알드 달의 단편들을 각색한 것과 최근작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트레일러를 보고 아 이사람은 옛날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했다. 고전 영화나 연극 같은 느낌을 주는 세트들도 그렇고... 이것저것 보다보면 그냥 현대인들은 옛 것을 답습하고 있다 이런 생각을 많이하게 되는 것 같다. 원체 꼰대이다 보니 과거의 것들이 항상 더 좋게 느껴지는데, 현대의 것은 좋다기 보단 편리하다에 가깝지 않나 싶다. 편리한 것과 좋은 것을 구분하는 것이 좀 힘들지만... 인터넷이나 스마트폰만 해도 인류의 일상을 완전히 바꿔놓은 수준이지만, 또 생각해보면 없었던 시절에도 잘 살았던 것 같다. 뭔가 최신의 과학과 문명이 온갖 것에 대한 접근성을 아주 높여 준 반면에 관심의 깊이는 아주 적어진 것 같고 그래서 옛날에 고생하면서 지식 쌓던 사람들이 더 잘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듦.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출간한지 100년이 넘지 않은 책은 안 읽는 사람이 나오던데 그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지만 어쨌든 고전도 자주 보는 습관을 들여야지.

 

https://www.youtube.com/watch?v=swUlDc3v3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