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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피(Santa Sangre, 1989)

 쉬는 날 오전부터 아내와 영화를 오래동안 봤다. 장르나 시대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무작정 틀었던 영화들 중 가장 좋았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성스러운 피는 그의 1989년 작품으로 이전 작 엘 토포와 홀리 마운틴이 존 레논의 지지를 얻고 난 후, 레논이 영화 제작 과정에서 투자를 많이 해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레논 사망 후 판권을 소유한 레논의 전 매니저와 다퉈서 전세계로 영화를 배급하지 못했고, 조도로프스키는 그저 컬트영화 감독 정도로 남았다는 말도 있다. 일설에는 매니저가 에로영화를 찍으라고 했다는데, 한국 웹에 떠도는 소문들의 신뢰성을 고려한다면 그저 그럴싸한 가설이지 않을까. 사실 영화가 좀 에로하긴 하다.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를 알게 된 것은, 결혼 전 아내와 모텔에서 영화를 보다가였다. 20대 중반 무렵 나는 니콜라스 빈딩 레픈에 좀 빠져 있었고, 동시에 무지에서 비롯되는 독단적 확정짓기에도 빠져있었다. 불법 다운로드로 본 니콜라스 빈딩 레픈의 온리 갓 포기브스는 난해한 영화였다. 영화 말미에 조도로프스키에게 바치는 짤막한 헌사가 등장한다. 당시에 레픈은 조도로프스키에 상당히 빠져 있었고, 이것이 그의 영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너무 늦게 알게됐다. 어쨌든 그 경험 후로 나는 레픈과 조도로스프키에 대한 관심을 버렸고,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마음도 조금 있었다. 

 OTT를 뒤적이다 찾은 조도로프스키의 이름은 결코 유쾌하지는 않았던 10년전 레픈을 상기시켰다. 얼마나 대단한지 보자 하는 저돌적인 심정으로 틀었던 영화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영화는 정신병원에 갇힌 남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는 서커스 단장과 교주의 아들이다. 서커스 단장 아버지는 마초적인 남자이며 다른 서커스 단원과 바람을 피운다. 내연녀를 과녁에 세워놓고 칼 던지기를 하는 장면은 예술과 외설의 수위를 정말 간당간당하게 지켜서, 개인적으로는 감독의 밀당 실력이 참 좋다고 느꼈다. 어머니는 기이한 종교의 교주인데 그녀와 신도들의 숭배 대상은 과거에 강간당하고 양 팔이 잘려 죽은 여학생이다. 그들은 정식 교회로 인정받고자 하나 결국 교회에서 이단으로 취급 받아 예배당을 철거당한다.

남자는 꼴마초 아비와 맛이 간 어미 사이에서 여러가지 고초를 겪으며 어린시절을 보낸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섹스를 훔쳐보는 장면이 꽤 의미심장하게 등장하는데 예전에도 썼지만 어린시절에 지나친 자극을 경험하게 되면 정신적으로 병들기 마련인 것 같다. 후에 서커스단에서 기르던 코끼리가 병에 걸려 코에서 피를 쏟으며 죽게되는데 비참한 상황과는 반대로 영상은 무척 나름다웠다. 코끼리의 죽음에 충격받은 어린 주인공에게 사나이가 되라는 의미로 그런 남자의 가슴에 문신을 단검으로 그냥 새겨버리는 아버지. 영화에 등장하는 문신들은 정말 올드스쿨 걸작이라고 할 정도로 좋은데, 반면 고증은 좀 이상해서 의아했다. 아무튼 문신 보유자로서 말하자면, 사나이라서 문신을 하는 사람은 있지만 문신을 해서 사나이가 되는 사람은 없다... 

 남편의 바람질에 질려버린 교주 아줌마는 결국 남편에 고추에 황산을 뿌려버리게 되고... 자신의 가장 자랑스러운 상징을 잃게된 단장은 부인의 양팔을 잘라 죽이게 된다. 자신이 숭배하던 대상처럼 죽어버린 아줌마. 그녀를 뒤로하고 단장은 서커스 천막이 불타는 모습을 보며 자살한다. 이런 인생의 아주 더러운 맛까지 보게 된 어린 주인공은 결국 정신병원으로 간다...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후부터 남자는 팔 잘린 어머니의 환영을 보게되고 그것은 남자를 살인하게끔 명령한다. 살인 장면은 마치 이탈리아의 지알로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각본을 같이 쓴 사람이 다리오 아르젠토의 동생 클라우디오 아르젠토였다. 조도로프스키의 영화 커리어가 미드나잇 무비로 시작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도 아닌 것 같다. 영화에는 우리와는 신체가 다른, 장애를 가지거나 병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자주 등장한다. 왜소한 사람, 거대한 사람, 여장남자, 다운증후군 등.. 이것은 감독의 이전작 엘 토포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모든 신체가 아름답기 때문에 이런식으로 장애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자 한다는 말이 있다. 혹은 그저 변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여장남자 레슬러가 꽤 인상적이었는데 그들은 서로의 합이(레슬링 팬들은 접수를 잘한다고 표현한다) 꽤나 잘 맞아서 연기자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imdb에서 찾아보니 링 네임이 있는 것이 실제 레슬러들 같았다. 레슬러들의 신체는 솔직히 좀 기괴한데, 근육질 남자 몸에 마치 고무공으로 된 유방을 달아놓은 모습이었다. 훨씬 보수적인 사회였던 80년대 당시에 그런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남자는 몇 번의 살인 끝에 서커스 시절 첫사랑 농아 소녀와 재회하게 되고 그녀의 도움으로 어머니의 명령을 이겨내는데 이것은 이제는 좀 흔해서 진부해진, 남자의 구원은 여자가 다 한다 이런 느낌이긴 한데, 어쨌든 어머니에 대한 기괴한 컴플렉스를 이렇게 해소한다는 것이 꽤나 근거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어머니가 살인명령을 내리는 환각이나 살인 후 그녀가 등장해 주인공을 위로하는 장면은 모두 마임공연처럼 꾸며진다. 배우들의 마임은 잘 모르는 내가 보아도 아주 수준이 높은데 감독이 대학에서 심리학과 철학을 2년 공부하다가 중퇴하고는 마임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은 후에 알았다. 주연배우는 감독의 친아들인 악셀 조도로프스키로 아쉽게도 지난 해 가을, 57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악셀은 성스러운 피를 찍기 위해 마임을 예술학교에서 3년 배웠다는 카더라가 있는데, 진실은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는 이 작품으로 새턴 어워즈에서 베스트 액터에 노미네이트 됐다. 주인공의 어린 시절 역시 감독의 어린 아들이 연기했다.

조도로프스키는 앞서 언급한 클라우디오 아르젠토와 또 한 명의 각본가 로베르토 레오니의 협업으로 각본을 완성했다. 로베르토 레오니는 정신병원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한 적이 있었고, 나름대로 소름돋는 경험을 통해 영화의 갈피를 잡았다. 그의 경험은 이랬다. 사서로 시간을 보내던 중 어떤 환자가 도서관에 와서 자신을 쳐다보던 와중, 허공에 대고 계속 그만하라고 말했다. 넓은 도서관에 단 둘이 있던 상황이라 많이 쫄았던 로베르토 레오니는 환자를 겁에 질려 바라볼 수 밖에 없었고, 환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안심하세요, 당신을 죽이라고 그가 계속 말하지만 나는 듣지 않을거에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레오니는 그 말 때문에 환자를 신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감독은 영화 제작 전에 멕시코 길거리 바에서 우연히 고이오 에르난데스라는 멕시코의 1940년대 연쇄살인범을 만나게 된다. 에르난데스는 1910년대 출생으로 4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감옥에 가는 대신 정신병원에 수감됐는데, 조도로프스키와 만난 무렵에는 이미 퇴원한 상태였던 것 같다. 조도로프스키의 취미 중 하나가 타로카드이니 바에서 타로를 봐주다 만났을지도... 생각보다 훨씬 제정신이 아니었던 에르난데스의 썰은 조도로프스키에게 많은 영감을 줬나보다.

 거의 10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레픈을 멸시했던 것을 반성하게 됐다. 레픈의 온리 갓 포기브스는 조도로프스키에게 바치는 거대한 헌사였고, 따라서 조도로프스키의 성스러운 피를 보지 않았다면 자연히 이해할 수 없는 영화기도 했다. 레픈은 조도로프스키가 연극처럼 표현한 외디푸스 컴플렉스를 북유럽적(좀 기이한) 감성으로 비틀고, 중남미가 아닌 동남아시아를 배경으로 선택하면서 생경한 풍경에서 비롯되는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온리 갓 포기브스에서는 범죄자를 처단하고는 꼭 노래를 불러 제끼는 경찰 아저씨가 나오는데, 마치 살인 전후로 어머니의 환영과 마임 공연을 펼치는 주인공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또한 태국 뒷골목에서 불법적인 일로 살아가던 주인공 라이언 고슬링은 엔딩에서 팔이 잘리게 된다. 얼마전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짓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아무리 자연의 법칙이라고 해도,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생명의 희생으로 살아간다. 밥을 한 끼 먹어도 온갖 동식물의 죽음을 댓가로 밥상은 차려진다. 결국 죄를 짓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면, 팔을 절단하는 것은 꽤나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레픈은 한 때 성스러운 피에서 받은 영향을 동어반복적으로 드러냈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와 같이 했던 투 올드 투 다이 영은 마치 성스러운 피 찬양을 10화 짜리로 해주겠다 하는 느낌이다. 부패한 경찰과 멕시코 카르텔의 살인과 범죄는 모두 여성의 명령으로 이뤄지게 된다. 다른 갱의 리더를 납치하고 자리에 던져 놓은 그의 잘린 팔이 나오는 장면은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좀 노골적이다. 북유럽 사람들 좀 이상하긴 한 것 같다.
 다가오는 연말에는 영국을 가려고 하는데, 숙소에도 넷플릭스가 나왔으면 좋겠다. 유럽에서 유럽 영화 보는 재미가 참 좋을 것 같다. 음식은 좀 별로일 거 같아서 좋은 거나 많이 보고 왔으면 한다.